W2001

워드프레스는 오픈소스를 기반으로 한 세계 최대의 콘텐츠 관리 시스템(CMS, Content Managment System)으로, 2003년에 미국의 프로그래머 매트 물렌웨그가 창립했다. 차연서는 2020년 상반기부터 2021년 상반기까지 약 15개월 동안 워드프레스로 만든 기본형 블로그에 종종 메모와 일기를 올렸으며 한 명의 친구가 구독했다.


2021년 4월 (1)
2020년 5월 (1)
2020년 2월 (3)
2020년 1월 (3)

2021-04-26

너무 많은 아이디와 너무 많은 비밀번호, 오랜만에 이곳을 찾았는데 아이디 조차 기억이 안 난다. 크롬에 저장된 ******** 따위로 사적인 공간에 접근하는 일은 바보같다.

리듬에 연결되는 일은 중요하다. 모든 아픈 사람은 리듬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리듬은 이미 존재하고 있다. 슬쩍 슬쩍 엿보이는 다양한 차원들에. 우리는 그것을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접속된다.

오늘은 창작지원사업에 기획안을 발표했다. 학교 일이라 간만에 동기도 만나고, 언젠가는 친해질 수 있으리라 기원하는 애정하는 사람의 애인도 만나고, 또 … 동기도 만났다. 대기실의 아마도 연구조교일 사람이 아주 친절해서 멋있었다. 그 사람의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특색 없는 얼굴은 정말이지 몇번을 보기까지 잘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이름과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데, 새로 일하기 시작한 아동미술학원에서는 내가 맡은 어린이들의 얼굴과 이름을 거의 다 외운 것 같다. 왜냐면, 아이들은 항상 이름을 불러주어야하기 때문이다. 저기, 저, 이딴 식으로 부르는 것은 우리 어린이들에게 실례다. 칭찬을 해도, 우리 누구누구는 무엇을 잘 하는구나, 하고 말해줘야 한다. 동료 선생님들의 말투를 보고 배우는 것에 불과할 지도 모르지만. 어린이들은 자신에게 정중하지 않은 사람들에 누구보다도 예민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린이들에게는 항상 최대한의 존중을 표해야 한다. 쉽게 속지 않는 어린이들을 볼 때, 나는 너무나 마음이 반짝거려진다.

그래서, 두번째로 나와 정식 수업을 한 자매가 체험 수업 때 본 다른 선생님과 나를 비교하며 애정을 표현해주었을 때 정말로 기뻤다. 초등학교 6학년인 언니는 선생님이 더 좋아요, 하고 담백하게 툭 뱉었다. 초등학교 1학년인 동생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누구 편을 들어야할 지 모르겠어요! 그 선생님은 칭찬을 많이 해줬고요, 쌤은요, 제 마음을 들어주고 알아줘요. 제 마음을 들어주고 알아줘요.

도마의 <화양연화>를 듣고 또 듣는다. 주로 애인과 속상한 일이 있었을 때 듣는다. 다른 곡들도 정말 좋다. 꼭 오래 살자. 조금 늦게 알아준다하더라도, 부고로 알게되는 것이 아니라, 더 좋아진 작업으로, 내 옛날의 진심과 서툼들도 알아주도록.

말이 많이 샜지만, 쓰려 했던 것은 오늘의 기쁨이다. 꾸역꾸역 준비했던 기획서들이 모여서 새로운 작업의 새싹 혹은 씨앗 정도의 수준으로 태어났다. 발표 준비를 통해 무언가가 생겨난 걸 느낀다. 멍게비빔밥에 넣어서 먹어버리거나 오독오독 씹어먹지 않도록 잘 심어보자. 결과가 어떻게 되었건, 이미 잉태된 작업이다. 책임을 져야지, 응?

4주 간, 일기쓰기 모임에 참여했었는데 그덕에 일기쓰기에 대한 리듬이 조금 살아났다. 일기쓰기 네트워크를 다시 구성하면 좋을텐데. 좋은 네트워크는 리듬 만큼이나 필수적이다.

자, 덧붙여서, 이미 잉태된 관계에 대해서는 어떤 책임을 질 수 있나, 스스로 자문해본다. 그가 잃어버린 것 만큼이나 나도 무언가를 잃어버렸기에, 이렇게 살아가는 것일텐데, 나는 자꾸 퍼즐을 맞춰본다. 포기하고 싶다는 마음이 피어나는 것은 버티고 있다는 것인데, 버틴다? 나는 왜 항상 연애가 버티는 것이 될까? 처음으로 항정신제를 먹기 시작했고, 심리 상담을 다시 시작했는데, 도움이 되기를.

2020-05-17 (review)

JTBC <부부의 세계>
– 주현 각본, 모완일 연출
– 원작 BBC <닥터 포스터>

16화 완 – 지선우 (김희애) 나레이션
“아무리 애를 써도 / 용서란 말을 입에 올릴 수는 없을 것 같다. / 누군갈 용서한다는 건, / 누군갈 단죄하는 것 만큼이나 / 오만한 일이란 걸 알아버렸으니까. / 그저, / 난 내 몫의 시간을 견디면서 내 자릴 지킬 뿐이다. / 언젠간 돌아올 아들을 기다리면서 / 그 불확실한 희망을 품고 사는 것, / 그 불안을 견디는 것, / 모든 상황을 내가 규정짓고 심판하고 책임지겠다 생각한 그 오만함을 내려놓는 것이 /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겠지. / 삶의 대부분을 나눠 가진 부부 사이에 한 사람을 도려내는 일이란 / 내 한 몸을 내줘야한다는 것. / 그 고통은 서로에게 고스란히 이어진다는 것. / 부부 간의 일이란 결국, / 일방적인 가해자도 / 완전무결한 피해자도 성립할 수 없는 게 아닐까. / 우리가 저지른 실수를 아프게 곱씹으면서 / 또한 / 그 아픔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매일을 견디다보면, /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 – 부재의 방문 ] / 어쩌면, / 구원처럼 찾아와줄지도 모르지. / 내가 나를 용서해도 되는 순간이.”

부부의 세계는 현 한국 사회에서 표준이자 정상성으로 욕망되는 중산층 이성애 결혼 관계의 이면을 적극적으로 가시화한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넓은 관객층을 포섭해내려 기꺼이 노력하면서도 소비적 막장이라기보단 생산적 끝장을 보여준다. 서사 내내 모든 주연 여성 캐릭터들은 이성애 관계로 인해 남성에게 갖가지 위협, 배신, 기만에 시달리며 여성 간에는 소위 ‘여적여’ 프레임으로 해석되기 쉬운 전쟁을 벌이지만 그 와중 여성들간에 등장하는 리드미컬한 연대는 연대라는 단어를 놀랍게도 구체화한다. 세련되게, 교묘하게, 또 과감하게 이성애를 메타하며, 집요한 시선으로 지금 여기를 들여다본다. 그렇기에 소위 ‘시스센더 헤테로섹슈얼’로 분류되기 쉬울 모든 여성 주연이 독신으로 막을 내리는 것은 지금까지 부부의 세계가 보여준 (불가능한 호흡에 온 몸을 펄떡이는 그물 위 물고기 같은) 생생한 시선에 비해서는 오히려 평범한 결말인지도 모른다.

감정의 극단을 치닫던 이 모든 드라마를 텍스트로 전환해내는 놀라운 엔딩 – 돌아온 아들에는 끝까지 포커스를 흐린다. 고도를 기다리며, 복수도 용서도 과연 속절없이 구원을 기다리며, 우리는 죽고 (드라마 속 세 번의 자살 시도, 그 중 한 번의 죽음), 죽지 않고, 그렇게 매일을 살아내는 수 밖에.
			

2020-02-29 (bookmark)

그것은 단순하다. 사람들은 예술 작품들을 제작한다.
우리는 그것들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이다.
– 세르주 다네(Serge Daney, 1944-1992)

한편 그럼에도 원재료로 농부처럼 일하고도 싶은 나로선 어떤 반감도 든다.

아래 북마크들은 늘 그렇지만 내 맘대로다. 급하게 읽어서 중요한 내용이 빠져있을 수도 있다. 절판이고, 도서관에서 겨우 예약 기다려서 받은 책인데 또 누가 예약해놔서 연장도 못한다.
(이하 bookmarks)

나는 이 작가들이 하나같이 인간과 인간 사이(interhuman)의 영역을 다룬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들은 모두 사람들, 커뮤니티, 개인과 그룹간의 관계를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인용과 리사이클링, 전용은 어제오늘 생겨난 개념이 아니다. 다만 여기서 확실한 것은, 오늘날 [..] 이것들은 놀랍게도 새로운 예술적 실천의 ‘엔진’을 구성할 정도로 최전선에 있다. […] 이제 동시대는 형식들(forms)을 사용하는 문화를 향해, 즉 집단적인 이상에 바탕을 둔 기호의 지속적 행위 문화, 즉 공유(sharing)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 예술가들이 문화 시장에서 이미 유통되고 있는 대상들에서 재료를 찾을 때, 예술 작품은 시나리오 같은(script-like) 가치를 지닌다, “그때 대본은 형식이 된다.”

나에게 비평은 [..] 신념(conviction)의 문제이다. 나의 이론들은 현장에서 작품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태동했다. 나는 저널리스트와 같은 객관성에 대한 열정이 없으며, 철학자처럼 추상화시키는 능력도 갖추고 있지 않다. 철학자는 자신의 이론들을 위한 예시를 들기 위해서 우연히 발견한 예술가들에게 매달리지 않는가.

그러므로 나는 내 주변을 둘러싼 것들을 묘사하는 데 집중할 것이다. 한 세대의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추상적 개념들을 설명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나는 그들의 흔적 속에서 개념들을 구축하고 싶다. 나는 이 예술가들과 함께 생각한다. 이것이 미셀 푸코가 의도했던 의미에서의 우정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제2판 서문에서

포스트 프로덕션 – 몽타주, 다른 시청각 자료의 삽입, 자막 편집, 보이스 오버, 특수 효과 등 서비스 산업 및 재활용 (recycling)에 연관된 일련의 행위들, 원재료들을 생산하는 산업 영역이나 농업 영역과는 대조적인 제3차 산업(tertiary sector)

“의미를 찾지 말고 용도를 찾아라.”

이때 ‘포스트’라는 접두사는 […] 활동 지대(zone of activity)와 관련된 의미를 담고 있다. […] 문화의 모든 코드와 일상의 모든 형식, 그리고 전 지구적 유산을 구성하는 작품들을 모두 포착하고, 그것들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DJ와 웹 서퍼, 그리고 포스트프로덕션 미술가의 활동은 모두 서로 유사한 지식의 구성(configuration of knowledge)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것은 문화를 통한 새로운 경로들의 발견으로 특징지어진다. […] “기호-모험가”는 이질적인 사이트들 사이의 연결 관계인 링크를 상상한다. […] 문화사의 곡류에서의 멈추지 않는 항해를 암시하며, 이 항해 자체가 예술적 실천으로 자리를 잡는다.

“다소 환상적이고 이상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나와 타자들 사이에 동일한 능력을 가정한 일종의 평등성, 즉 평등한 관계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본 것에 대응해, 자기 자신의 참조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사용 문화(culture of use) […] 그것은 이제 […] 무한한 시나리오로 […] 진동한다. 예술이 일상의 형식들과 문화적 사물들을 작동(fuction)시키는 것이다. 오늘날의 예술적 창조를, 고독한 노력이라는 고전적 신화가 아니라, 집단적 스포츠에 비교해 본다면 어떻겠는가?

– 서론에서

선택하는 것과 제작하는 것, 소비하는 것과 생산하는 것 간의 동등성을 성립해 내는 것이 바로 레디메이드의 근본 가치 인데, 이는 노력을 숭배하는 기독교 이데올로기나 노동자 영웅주의(Stakhanovism)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사용(use)이란, 포스트프로덕션을 구성하는 마이크로도용(micropirating) 행위인 것이다. 즉, 우리는 작가가 애초에 의도한 대로 책을 읽지 않는다. […] 문화 유저(user)들은 명확하고 체계적인 진술과 연관되어 있고, 그 결과 목록화할 수 있는 숫자와 코드 언어들에 연관되어 있는 “책략(ruses)”과 실천의 수사학을 효율적으로 사용한다.

미술은 가장 비가시적인 과정에도 형태와 무게를 부여하게 마련이다. 우리의 존재를 구성하는 무든 부문이 경제의 세계화로 인해 추상화될 때, 그리고 (본격적으로 산업화되고 있는 인간관계를 포함하여) 우리 일상생활의 기본적인 기능들이 천천히 소비의 상품으로 변환될 때, 미술가들이 이러한 기능들과 과정들을 재물질화(rematerialize)하려고 노력하는 것, 다시 말해 우리 눈앞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 것들에 형태를 부여하려 하는 것은 매우 논리적인 흐름으로 보인다. 그러한 물질화는, 물신화(trap of reification)의 함정에 빠질 우려가 있는 오브제로서가 아니라, 경험의 매체로서 이뤄진다. 스펙터클의 논리를 깨뜨리고자 분투함으로써, 미술은 세상을 우리가 겪어봄직한 경험으로 복구시켜 주는 것이다. 경제 체제는 우리에게서 이러한 경험을 천천히 앗아가기 때문에, 재현 방식들(modes of representation)은, 하루가 다르게 추상화되어 가는 현실에 맞춰 새로이 발명되어야 한다.

– ‘사물의 사용’에서

만약 어떤 관객이 “내가 본 그 영화는 너무 별로였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그건 당신 잘못이다. 그 영화의 대사가 좋아질 수 있도록 당신이 한 일이 도대체 무엇인가? (- 장-뤽 고다르)

이제 예술 작품은 우리 모두의 소유인 것이다. […] 우리는 저작권을 없애고 예술 작품들에 대해 프리 엑세스를 허용하는 정책을 선호하는 문화, 즉 형식의 공산주의를 위한 청사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인용들’을 맹목적으로 보존하려는 행위는 어리석은 이들에게 맡긴다.

80년대의 열광적인 소비자(ecstatic consumer)들은, 이제 지적이며 체제전복적인 성향을 띠는 소비자에게, 즉 형식의 사용자들에게 그 자리를 내주고 있다.

“미술은 실재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막상 미술은 실재에 대한 모든 개념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것은 실재를 어떤 표면적인 것, 즉 파사드나 재현, 혹은 구축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미술은 그러한 구축의 동기들에 대한 질문들을 제기한다.” 그리고 그러한 “동기들”이란 정신적 틀과 ㅗ자대, 유리 장식장 등으로 표현된다. 문화적 형식이나 사회적 형식들을 잘라 내 다른 맥락 아래 둠으로써, 켈리는 이러한 형식들을 원래의 포장(original packaging)에서 해방된 인지 도구(cognitive tools)로 활용한다.

생산의 카오스적 확산은 개념주의 미술가들을 미술 작품의 비물질화라는 방향으로 이끌었고, 포스트프로덕션 미술가들을 프로덕트(제품)의 혼합 및 결합이라는 전략으로 이끌었다. 과잉 프로덕션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닌 문화적 생태계로 받아들여진다.

인간 사회는 내러티브들, 즉 비물질적 시나리오들에 의해 구축되는데 […] 포스트프로덕션 미술가들은 이러한 형식을 이용해서 다양한 이야기 구조를 해독하고 대안적/대페적 내러티브를 만들어 낸다. […] 이때 형식들은 이렇게 제시된 내러티브를 물질화하는 역할을 한다.

티라바지나의 작품 제목은 거의 항상 “많은 사람들(lots of people)”을 괄호 안에 암시한다. 사람들은 전시의 한 구성 요소이다. [..] 그 전시의 의미는, 그 전시를 관람하는 “사람들(population)”이 그 전시를 어떻게 사용(the use)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마치 레시피는 그것을 바탕으로 한 물질적인 실재가 형성되었을 때야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듯이 말이다. 일상적인 기능(음악 연주, 식사, 휴식, 독서, 수다 등)을 수행하도록 고안된 공간들은 예술 작품이 되고, 오브제가 된다. […] 티라바니자의 작업이 묘사하는 노마드는 국가적 분류와 성적(sexual) 분류, 그리고 부족에 따른 분류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다. 그들은 국제적인 공공 공간(public space)의 시민으로서 이러한 공간들을 일정 기간 동안 여행하며 곧 새로운 정체성을 취한다. 이들은 어디에서나 이국적이다. [..] 어느 곳에도 거주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 주는 것이다.

위그는 […]지속적으로 바복될 수 있는 원형의 생산, 일상 행위를 위한 시나리오로서의 예술 개념을 주장하고 있다.[…] 예술이 제시하는 형식들을 그저 무뚝뚝하게 관조하기 보다는, 세계를 보기 위해 예술을 사용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도미니크 곤잘레스-포에스터의 “방(Chambres)”연작은 비평가들로 하여금 종종 지나치게 개인적이거나 분위기가 과하다는 인상을 받게 한다. 하지만 그녀는 사적인 영역을 가장 시급한 사회적 문제들과의 관계 속에서 탐구한다. […] 관람자들은 쇠라와 같은 점묘파의 입자들을 광학적으로 혼합해서 보듯이 모든 것을 감각적으로 섞어야 한다. […] 이는 작가가 오토몽타주(automontage)라 부르는 것인데, 우리가 사는 방식들의 진화에 대한 관찰과 함께 시작된다. […] 정서적인 사물들과 색칠된 평면도로 구성된 그녀의 우주는 조나스 매커스(Jonas Mekas)의 실험 영화와 홈무비를 연상시킨다. […] 우리는 분석가들이 기억의 흐름을 촉진시킬 때 쓰는 유동적 듣기(floating listening)와 유사한 유동적 시선(floating gaze)를 동원해야 하는가? 곤잘레스-포에스터의 작업들은 바조 일상생활과 관련된 모든 서사들의 윤곽을 흐리는 이와 같은 애매함(vagueness) – 한때의 친밀함과 비정함, 엄격함과 자유로움- 에 의해 규정된다.

길릭의 작업들 역시 청중의 참여를 전제한다. 실제로 그의 작업은 협상 테이블, 토론을 위한 플랫폼, 빈 무대, 게시판, 드로잉 테이블, 스크린, 그리고 정보 열람실과 같은 집합적이고 열려 있는 구조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길릭은 “나는 사람들이 갤러리에 전시된 예술 작품이 사물이나 생각들의 최종 해답은 아니라는 사실을 전달하고자 한다”고 서술했다.[…] 산업적으로 제조된 대상은 기본적으로 그렇게 미완성된 형태로 나타날 수 없다. […] 일반적으로 대량 생산 양식은 그것의 예측가능성, 통제가능성, 규칙적인 성질을 주장하기 이해 시나리오로서의 대상을 파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측불가능성, 불확실성, 놀이(play)를 재도입해야만 하는데, …

[…]

-형식의 사용

전시회는 더 이상 과정의 최종 결과물로서의 “해피엔딩”(파레노)으로 볼 수 없으며, 그보다는 어떤 생산 장소에 가깝다.

일반적으로, 전시장은 더 이상 유기적 전체와 같은 사회적 신체로서 다뤄지지 않는다. 우리는 인공 기관과 가변적 속성에 따라 확산된 동시대 신체 이미지 속에서, 그것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분리시킬 수 있는 구조들의 집합으로 인지한다. 또한 20세기 후반의 미술가들에게 있어서 사회는 단체와 쿼터, 그리고 커뮤니티로 분화되었을 뿐 아니라, 서사 구조들의 방대한 목록이 되었다.

해킹, 일 그리고 여가

[…]

혼합은 특정한 레시피라기보다는 어떤 태도나 윤리적 입장에 가깝다. 작업이라는 측면에서 포스트프로덕션은 예술가로 하여금 해석 중심의 태도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비평적 해설에 관여하는 대신, 우리는 질 들뢰즈가 정신 분석에 주목했던 것처럼, 직접 실험을 해야만 한다. 즉, 우리는 징후들에 대한 해석을 멈추고, 보다 적합한 배치를 시도해야 하는 것이다.

-‘세상의 사용’ 에서
			

2020-02-10

장식과 범죄를 읽었다고 하니, 학교 서 두 선생님이 추천했던 책이라고 추천을 받았다. (그런 책들이 있다. 책 제목은 귀에 굳은 살이 박히도록 들었으나 아직 첫장을 넘겨본 일 없는… 나는 방학 때라도 어서 이 빚진 마음을 덜고 싶다. 그 이후엔 읽어야하는 책을 덜 빚질 수 있는 일과를 찾고 싶다.)

‘키치는 순수를 염원하는 창녀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순수를 염원한다면 먼저 창녀이기를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p.57)’는 대목은 정말이지 웩스럽다. ‘혹시 왕녀로 위장한 시녀는 아닌가'(p.68) 이딴 표현들은 처녀작 뭐시기하는 태도랑 다른 게 없다.

기록하는 문장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 ‘정말 그런가?’ 의 사이이다.

키치는 우리 내면에 자리 잡은 어떤 비겁함에 기생하여 번성한다. […] 키치의 첫째 특징은 바로 기만적이라는 것인데 이는 남을 속인다는 점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속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므로 ‘자칭’ 키치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물론 키치를 계속 채용하고 또 방법론적으로 키치를 소비함으로써 오히려 삶과 우주를 냉소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행위가 키치에 어떠한 가치나 진지함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p.9

키치는 ‘이차적 눈물(The Second Tear)’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삶 본연의 의미보다는 자기 자신의 허구적 모습에 현혹되어 살아갈 경우 우리는 속물로 전락하며 동시에 키치적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키치는 이차적 작용을 자기 존재의 이유로 가진다. […] 키치는 거리를 요구한다. 단지 그 거리가 감상자와 그 감상자가 조작해낸 환상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다.
예시 – 연민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 / p.13 / p.17

실존주의는 간단히 말해 실존의 의미를 묻는 우리와 그 의미에 대해 무심한 세계가 대립하고 있다는 ‘부조리’에 기반한다. […] 키치의 토양은 이와 같은 것이다. […] 삶과 예술은 강인하고 자기포기적인 결의를 전제하는 것이다. 삶에는 어떤 주어진 의미, 어떤 궁극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도 없다고 할 때 이것을 견뎌낼 스토아주의자가 되기는 진정 어려운 것이다.
p.16~17

자기 합리화가 불가능할 정도의 바보는 없다. 마찬가지로 합리화란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지 자기 개선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정도로 지혜로운 사람도 없다. […] 이것은 병적인 행복이다. 우리는 병이 낫기를 두려워한다. 순수예술이 환기하는 불안과 불온과 불편의 요소는 여기에 있다.
p.32

키치가 가진 혐오스러운 위험성은 그것이 현실 옹호적이라는 데 있다. 우리 삶의 철학적ㆍ사회적 전제조건은 끊임없는 존재의의의 탐구와 현실개선이다. 우리는 두 종류의 실존 가운데에서 분투한다. […] 우리는 현재의 삶이 지난 삶의 결과물로서 결코 의미 있다고는 할 수 없어도, 미래에는 새로운 시도에 의해 우리 삶을 개선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키치는 “열려있다”는 기만 속에서 미래를 닫아버린다. 그것들은 개선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현실 옹호적이며, 한쪽 눈을 날카롭게 뜬 척 하지만 다른 쪽 눈은 감아버린다.
p.42

“아아, 인생은 아름다워라”하는 키치의 달콤함은 쉽게 싫증나는 것이다. 모든 진정한 예술은, 자연과 인간과의, 의미와 무의미와의, 영원과 덧없음과의 갈등을 거짓 없이 드러내놓고 그 해소를 위해 애쓴다. 이 부조리가 극복ㆍ승화되는 때에만 일시적인 만족감을 가진다. 그러나 키치는 이 긴장을 허구적으로 해소시킨다. […] 거기에서는 환상과 현실이 쉽게 교류할 수 있으며, 모든 갈등과 투쟁은 평화롭게 해결되고, 가난과 부는 언제라도 소통한다.
p.43

스스로 노동을 자연에 가하여 무엇인가를 변화시키고 얻어낼 때, […] 그의 역략이 아무리 미약한 것이고, 그의 창조력이 아무리 빈곤한 것이라 해도 일하고 있는 한 그는 한 명의 창조자이며, 이 점에서 베토벤과 다를 것이 없다. […] 노동은 자기 창조적인 전체성을 지녀야한다. 농부는 최초의 밭갈이에서 추수까지, 작업의 전 과정을 전체적으로 주도한다.

그러나 현대에는 […] 자신의 작업이 가장 창조적인 자율성을 보장받으리라고 믿었던 사람들조차도 그의 작업현장에서 당황한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그것들을 소비한다. 그러나 […]안목은 창조적일 수 없다. 그들의 소비는 어떠한 창조적 작업도 아니며 어떠한 고결성도 지니지 못한다.

진정한 예술은 우리 바깥쪽에 존재하며 그 엄격하고 초월적인 미 때문에 소비계층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그것은 우선 자기 부정과 포기를 요구하며 자기로부터 벗어나 작품에 집중하기를 요구한다. 그러한 예술은 현대인이 처한 끝없는 근로와 예속을 고려하지도 배려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고급예술에 대해 반발과 모욕감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키치는 민주적이고 중간적이고 조촐한 것, 즉 프티 부르주아적인 것이다. 독창성을 위장하는 경우에도, 현대의 가소로운 가식적 전위성들이 그러하듯이, 감상자가 쉽게 접근할 우회로를 열어놓는다.
p.47~50

의연하지만 오만하게 존재하는 예술은 […] 일반의 취미판단으로부터 독립된다는 자유를 누리지만, 감상자를 소외시킨다는 죄 때문에 이번에는 스스로가 소외당하고 만다. 그러나 이것은 예술만의 문제는 아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삶에 충실하다는 이유로 비난받는가를 생각해보라.
p.54

아무리 기다린다 한들, 그 무료와 공허를 채우기 위해 아무리 많은 소리를 지껄인다 한들, 절대로 오지 않을 것만 같던 ‘고도’는 너무도 쉽게, 너무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치장하고 나타난 것이다.
p.68

키치는 우선 대중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준다. 이것은 마치 캡슐로 싸인 약이나 주사 놓기 전 간호사가 찰싹 때려주는 동작처럼 진정한 예술로 접근할 하나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하여 감상자를 점차 안목 높은 존재로, 진정한 예술 애호가로, 까다로운 요구를 해대는 예술 소비자로, 그리고 때때로 우주의 침묵 앞에서 파멸적인 고통을 짊어진 예술가로 키워낸다. […] ‘시큼한 키치’에만 알 수 없는 집착을 보이는 것은 고착이며 퇴행이다. […] 그러므로 연주자라는 직업을 가진 과거 예술의 시행자들은, 한편으로 청중을 끌어들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밀어내는 모순적인 일을 해야하는 입장에 처한다.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새로운 신화를 만들기를 원한다. 새로운 고뇌와 새로운 낭만과 새로운 키치를. 이것이야말로 키치적 키치이고, “시큼한 키치”이다.
p.77 / p.104
		

2020-02-03

The Age of Collage by gestolten, artist list

화집을 처분하다 작가 리스트를 기록해놔야할 것 같아서. 고3 때 실기고사 전 눈알 스트레칭으로 즐겨 보던 손 때 탄 책인데 이걸 보내줄 때가 오다니. 당시 이미지만 보고 마킹 해놓은 작가가 다 여성이라 신기하다. 콜라주 작업자, 그들은 분열된 주체, 혹은 그 너머를 신중하게 종이로 짜맞추는 듯 하고, 반면 상당한 수의 남성 작가들은 이미지를 함부로 자르고 접합한다는 느낌이 든다. 뭔가… 사용하는 이미지도 사용하는 방식도, 타자를 잘라 퍼즐 맞추듯 맞춰버린다. 그건 해체가 아니라 구태의연한 재현이다, 딱 인간 지네 수준으로. 콜라주 기법을 사용하면서도 새로운 걸 상상하지 못하다니 불쌍한 사람.

Astrid Klein; Beni Bischof; Dennis Busch; Luis Dourado; Valero Doval; Jesse Draxler; Eva Eun-Sil Han; John Gall; James Gallagher; Noa Giniger; Aneta Grzeszykowska; Ashkan Honarvar; Gordon Magnin; Max-o-matic; Dominic McGill; Wangechi Mutu; Dash Snow; Linder Sterling; John Stezaker; Sergei Sviatchenko; Jens Ullrich; Nathaniel Whitcomb; Mario Zoots; Bobby Neel Adams; Samuel T Adams; John Vincent Aranda; Hugo Barros; Hisham Akira Bharoocha; Matthieu Bourel; Julia Busch; Joe Castro; Jorge Chamorro; Jordan Clark; Tintin Cooper; Isabelle Cordemans; Eli Craven; Liam Crockard; William Crump; Cur3es; De Katrien Blauwer; De Edoardo Falchi; Harold Diaz; Scott Dickson; Benjamin Edmiston; Sarah Eisenlohr; Richard Galpin; Christopher Gideon; Johanna Goodman; Randy Grskovic; Beth Hoeckel; Philippe Jusforgues; Nils Karsten; Geoff J Kim; Vanessa Lamounier de Assis; Jon Legere; Nicholas Lockyer; Eugenia Loli; Mary Lum; Andrew Lundwall; Arturo H Medrano; Brion Nuda Rosch; Office Supplies Incorporated; Bryan Olson; Francisca Pageo; Andrew Riggins; Tres Roemer; Kent Rogowski; Jose Romussi; Justin James Sehorn; Jan Smaga; Kerstin Stephan; Brandi Strickland; Rodrigo Torres; Jesse Treece; Van Ruth Beek; Brian Vu; Leigh Wells; John Whitlock; Charles Wilkin; Martha Rosler

Spontaneous, irreverent, personal. Collage fits more perfectly into our current age than almost any other artistic technique. The technique of collage fits perfectly into our current age. Raw visual material is collected by an artist and then combined in such a way as to abstract the individual elements enough that the artist’s own vision becomes prominent. Because collage’s references range from other artistic works and techniques to scientific images, pop culture, and erotica, these raw materials reflect humanity’s collective visual memory and context. It’s collage’s broad scope―and irreverence―that make this technique so interesting for both artist and audience. So it comes as no surprise that a lively scene has developed around contemporary collage in the last few years. Our book cutting edges was the first to document work by this scene, which has continued to expand the possibilities of the genre. Beyond the lowbrow movement, which brings a fresh perspective to figurative surrealism, more and more established artists are now embracing this medium. Their work bridges the historical gap between the classic pioneers of the technique from the 1920s and today’s vanguard of contemporary collage. Showcasing outstanding current artwork and artists, The Age of collage is a striking documentation of this new appetite for destructive construction. The book also takes an insightful behind-the-scenes look at those working with this interdisciplinary and cross-media approach. While illustration, painting, and photography continue to fundamentally influence collage, the featured work also plays with elements of abstraction, constructivism, surrealism, and dada. Collage gives artists more room to stake out diverse artistic positions than almost any other existing technique. Through confident cuts, brushstrokes, mouse clicks, or pasting, collage gives the impossible a tangible form―while turning our worldview on its head along the way. In their visual confrontation with reality in our digital age, which has already made geographic, temporal, and artistic boundaries obsolete, these artists celebrate and exaggerate simultaneousness.

  • Leigh Wells, 2011 https://www.leighwellsstudio.com/deception-series#4
  • Vanessa Lamounier de Assis https://www.flickr.com/photos/pinks/
  • http://www.isabellecordemans.com/
  • 2020-01-14 (bookmark)

    벨 훅스, 남자다움이 만드는 이상한 거리감
    
    모든 남성을 압제자로, 그리고 모든 여성을 피해자로 이름 붙이는 급진적 페미니즘은 남성들의 실체와 그들에 대한 여성의 무지로부터 관심을 돌리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p.22)
    
    만일 남성들이 드러내놓고 여성들을 사랑한다면, 가부장 문화에서 그 남성들은 더는 진짜 ‘남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p.33)
    
    예전에 나는 여성들만 남성들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했다. (…) 우리 문화에서 모든 사람은 가부장적 남성다움에 대한 두려움으로 결속된다는 비밀, 이것은 우리가 다 함께 지키는 커다란 비밀이다. (p.39)
    
    감정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대와 사랑을 이루려고 할 때 누구든 괴로움을 겪는다. (…) 이 책은 남성들의 교정과 자기 회복이라는 연회, 그들이 감정 그대로 사랑하고 사랑받을 권리라는 연회에 내가 선사하는 선물이다. (…) 결국 남자아이들과 남성들은 사랑의 기술을 배우면서 스스로를 구원한다.(p.46)
    
    나는 사랑이란 자신과 타인의 영혼과 감정을 성장시키려는 의지라는 모건 스콧 펙의 생각과, 사랑은 느낌만이 아닌 행동이라는 에리히 프롬의 통찰력을 합해 사랑을 정의했다. 사랑을 알고 싶어 하는 남자들과 일하면서 나는 사랑을 배려, 헌신, 지식, 책임, 존경, 신뢰의 결합이라 생각하라고 그들에게 조언했다. 우리가 맺는 관계의 대부분에는 이런 면들 중 한두 가지가 있다. (p.109)
    
    결국 폭력에 반대하고 죽음에 반대하기로 하는 남자들은 충만하게 잘 살고 싶기 때문에, 그리고 사랑을 알고 싶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들이 진자 영웅인 남자들, 우리가 그 삶을 알고 존중하고 기억해야 하는 남자들이다. (p.117)
    
    “우리 생존의 핵심은 사랑이라는 걸 나는 배우고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들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 어쩐 일인지 괴로움이 누그러지고 가장 깊은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하며 마음이 약해지고 조금 더 열려도 안전하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과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느낌을 알아가기 시작한다.” (p.155)
    			

    2020-01-09 (scrap)

    http://artsonje.art/winter-study-2020/
    미학-지금-여기 : 자기-긍정 혹은 자기-창안의 몇 가지 사례 (양효실)
     
    2019년에 직업 때문에 이곳저곳을 전전하면서 새로 알게 된 이름들이 있다.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막스 슈티르너, 비타협적 인간 나혜석. 그리고 줄곧 나를 따라다니는, 아니 내가 따라가는 이름들이 있다. 버틀러, 푸코. 슈티르너는 뒤샹과 나혜석을 읽을 때 등장했고 버틀러와 푸코는 내 말들의 장소이기에 늘 급작스럽게 집요하게 꾸준히 등장한다. 이 이름들을 갖고 짠 ‘스크립트’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자아의 해방, 자기-창안, 타자의 우선성, 상호적 노출, 연합, 진리말하기와 같은 키워드가 등장하는. 예술가처럼 산다는 것, 혹은 자기자신으로 산다는 것, 무한한 차이들의 공존을 긍정한다는 것, 그 안에서 나를 음미한다는 것. 그런 이야기를 두서없이 웅얼거리듯 말할 네번의 기회가 마련되었다.
     
    1강 ─ 막스 슈티르너: 오직 자기-자신으로서 존립하는 것의 가치에 대하여
    막스 슈티르너(1806~1856)는 마르크스, 니체, 다다, 개인주의 아나키즘 전통에 영향을 준 19세기 청년헤겔주의 자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유일자와 그의 고유성(Der Einzige und sein Eigenthum, 1844)』은 자아, 독특한 자, 오직 하나인 자 등등을 동시에 함축하는 유일자란 개념을 통해 ‘보편적 인간’ 개념에 대적하려 한다. 거의 모든 근대적 휴머니즘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는, 오직 자기-자신으로서 존립하는 것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슈티르너를 따라가면서 무정부적-무원리적 개인들의 연합, 혹은 그의 말대로라면 ‘에고이스트 연합’을 상상해보자.
     
    2강 ─ 마르셀 뒤샹 & 나혜석: 환원불가능한 개인으로서의 예술가
    뒤샹은 막스 슈티르너에게 자신이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고, 나혜석은 1910년대 일본 유학에서 슈티르너의 아나키즘을 오빠와 애인을 통해 접한 것으로 보인다. 막스 슈티르너는 두 예술가에게서 어떤 차이를 통해 자신의 영향을 드러낼까? 환원불가능한 개인, ‘나’가 된다는 것의 두 가지 사례라고도 할 수 있겠다.
     
    3강 ─ 주디스 버틀러: 분리불가능성, 혹은 타자의 우선성에 관하여
    내 이야기를 수신하는/들어주는 네가 없으면 나는 이미 없다는 버틀러의 호소는 자아에 앞서는 너의 자리, 내 삶(-이야기)을 내게 되돌려주는 너의 영향력을 드러낸다. 1인칭 고백이 ‘성공’하려면 네가 거기에 있어야 한다. 자아와 타자의 동시성이나 분리불가능성, 혹은 타자의 우선성을 이야기하는 버틀러를 경유해서 詩(당일 결정)를 읽어보려고 한다.
     
    4강 ─ 미셸 푸코: 삶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들라
    말년의 푸코의 주제였던 ‘파르헤시아/진리말하기’는 자기자신에 대한 진리를 솔직하게 숨김없이 말하는 용기에 대한 것이다. 자기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왜 사회적 죽음을 불러올 만큼 위험한 것이란 말인가? ‘삶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들라’고 했던 푸코가 말하는 자기-제작 혹은 자기-발명은 파르헤시아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 강연자 소개
    양효실(미학자)
    서울대 미학과에서 「보들레르의 모더니티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여성, 청년, 동성애자 등을 재현하는 미적인 혹은 윤리적인 방법의 복수성과 다양성에 주된 관심을 갖고 활동하며 서울대, 단국대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권력에 맞선 상상력, 문화운동 연대기』(2017), 『불구의 삶, 사랑의 말』(2017) 등이 있고, 역서로는 『불확실한 삶』(주디스 버틀러, 2008), 『윤리적 폭력 비판』(주디스 버틀러, 2013) 등이 있다.
    			

    2020-01-09 (scrap)

    http://www.zineseminar.com/wp/issue02/%ea%b3%a0%eb%b0%b1%eb%a1%9d/
    고백록 : 몇 개의 이름들
    
    어떤 이들에게는 불결의 대상인 팬픽으로 자매의 언어 능력이 좋아지고 있다니 조금 웃기는 일이었다.
    
    내가 처음 가입한 곳은 풍림 고등학교라는 야오이 모의전이었다. BL물을 좋아하는 여자들이 모여 채팅, 게시글로 남성을 연기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다. 연애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고 서로의 합의가 되면 가상에서 현실로 이어지기도 했다. 로그인하면 남성끼리의 연애, 로그아웃을 하면 여성끼리의 연애가 되었다. 나는 이 교차가 굉장히 흥미로웠다.      
    
    페니스 두 개가 흔들리는 이 세계가 이상하게 편하게 느껴졌다. 지금에서야 어떤 이유에서인지 알게 됐다. 픽션이라는 점, 내 몸과 같지 않아 성적 투영을 하지 않게 된다는 점과 맑고 깨끗하게 그려진 페니스가 좋았다는 점이었다. 돌이켜보건대 나는 남성의 성기를 실물로 마주하는 일을 아주 싫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