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빠의 옷을 입고 - 아빠의 바지, 자켓, 신발, 모자, 가끔은 웃도리까지 죄다 아빠의 옷을 입고 나는 여기저기를 걸어다닌다. 레즈비언에 대한 전시를 준비하면서도, 비평가들을 만나러 가면서도, 공간운영자를 만나러 가면서도, 차려입어야 할수록 더 더욱 아빠의 옷들에 손을 댄다.
아빠에 대한 기억은, 심지어 아빠와 가족으로 살아온 지금까지의 생은, 완전히 재개편이 이뤄지고 있는 듯 하다. 그 과정은 생각하는 나라는 자아는 쉽게 따라가지 못하도록 이루어진다. 명상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감정적인 나, 영적인 나, 신체적인 나, 그리고 생각하는 나 - 이 네 가지 몸의 성숙도에 따라 제각기 받은 충격이 달라서 라고 한다. 심지어는 각자가 기억하는 것도 다 다른 것 같다. 화가 나고, 서운하고, 불안하고, 미안하기도 한 갖가지 감정들이… 따로 따로 몸을 움직이느라 그것들의 총체적인 얼굴인 나는 불연속적이다. 평화나 행복같은 건 빈대들처럼 침대 귀퉁이에 숨어있다가 잠든 나의 표면에 약간의 생채기를 남기곤 다시 숨어버린다. 아, 이 간지러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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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코를 엄청나게 골았다고 한다. 내가 질색을 하자, '넌 코 고는 사람을 끔찍해 하는구나'하고 뭔가 타박을 당했다. '너의 잠을 방해했다는 게 부끄럽고 싫을 뿐이야.' '정신과 약 때문이지, 뭐.' '정신과 약 정말 못됐다.' 이런 대화가 이어진다.
꿈은 일본에서 어떤 수련회스러운 페스티벌, 혹은 단기 레지던시에 참가하는 거였는데 주변인들의 나이가 다양했다. 행사가 하나 끝나고 식사하러 가야했는데 나는 이런저런 남는 물건을 챙기다가 어느새 일행이 다 사라진 걸 알았다. 주변엔 다른 단체로 보이는 일본인 여고생들이 그득했다. 밖으로 나가니 한 켠은 아주 조명이 밝았고 한 켠은 깜깜 어두웠는데 나는 그 어두운 쪽으로 가야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떤 일본인 남학생에게 길을 물었는데 실수로 한국말로 물었더니, 그는 일본어로 유창하게 중얼거리다가 더듬더듬 한국어로 길을 알려주려 애썼다.
나는 여전히 길 잃은 기분인 채로 꿈에서 깼는데, 상화가 ('내가 아는 상화, 반응하는 상화, 안아주는 상화, 유머러스한 상화')가 아니라 잠에 푹 눌린 상화임에, 그리고 길 잃은 꿈이 왠지 모르게 풍기는 불안함(왜?) 에 아침이 너무너무 힘들었다.
상화와 이리저리 몸을 맞대는 게 도움이 되었는데, 한편으론 오직 상화와만 이런 가까운 접촉 - 누르고, 베고, 괴고, 문지르고, 기대고, 안고, 깨물고, 찌르고, 몸과 몸 사이의 무게감과 부드러움과 단단함과 향취와, 살아있음, 반응하는 육심임, 순환하고 있는 하나의 소우주임, 왕국임 - 을 나눌 수 있다는 게 불안하고 외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지금 감각하는 이 친밀함을 어떻게 기록해낼 수 있을까, 아마 못하겠지? 못하고 또 이 순간이 휘발되겠지? 하고 또 포기를 했다. 요즘 나에게 너무 흔한 - '포기하기', '끝내 관두기', 그리고 어느 순간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찾아와 일을 하기 시작하고', '별 수 없이 산만해져서 힘겹게 의자에만 앉아 있기' 혹은 '의외로 운 좋게 집중력이 발휘되어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것이 태어남을 목도하기'.
다행히도 지금은 이렇게 penmax 펜으로 잠시 집중해 기록하는 것을 허용하는 이 시간을 즐기고 있다. 오늘, 기대한/계획한 (계획! 이 쓸모없는 배신의 말) 것들을 한두개는 해낼 수 있을까? 그것들을 '태어나게', '내 보호자이자 내 아기로서' 눈 앞에 한움큼의 작업물로 생겨나게 할 수 있을까?
광고, 마케팅, 이런 것들은 몸이 안 좋을 때 노출이 되면 이내 화가 난다. 지긋지긋하달 지 무자비하달 지. 번쩍거리고 공격적이고 정력적이고 기만적이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안구 오른 켠이 번쩍번쩍…. 그것이 무엇을 망가뜨릴 수 있는 지는 망가져 본 사람들 만이 알 수 있을텐데.
돈을 쓰는 데에 조금 더 단호해져야 겠다는 마음이 들면서도, 작업에 있어서는 돈을 아껴야겠다는 신경쓰임 자체가 결정유보로 정신을 갉기도 한다.
일을, 최대한 하고 싶지 않다. 더불어서, 마켓팅된 소비자도 왠만하면 되고 싶지 않다. 아빠는 어떤 마음으로 그 많은 물건들을 샀을까? 그 좋은 물건들을 다 나 쓰라고 두고 가버리니.
아빠가 보고 싶다. 돈을 좀 더 벌 수 있다면 내가 돈을 쓰고 싶은 것들도 있겠지. 아빠와 비슷할 지도 모른다.
<시설사회>를 읽었는데, 앞부분 정도. 우리가 먹는 농산물들이 대부분 제 3세계 노동자가 지방의 어느 농가에서 간이 건물에 유폐되어 숙시하며 수확해 내는 것이란 걸 읽으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세상이 어떻게 돼먹은 곳인지는 여길 보면 저기가 안 보이고…. 대통령이 되면 이 모든 걸 알 수 있는 것일까? 대통령 쯤 되어서 사회를 낱낱들이 살피곤 모든 부유하거나 가난한 스펙트럼을 이해하고 그러면은, 드디어 스스로를 죽일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예술가의 소비 습관, 시인의 sns 알고리즘, 활동가의 검색엔진 빅데이터.
계급, 권위, 권력, 돈, 에너지, 정력, 내가 그런 것들을 얼마나 투명인간 취급해왔던지. 겁에 질린 깜이처럼. 모든 게 지긋지긋할 뿐이다. 안 지긋지긋한 것도 있다, 물론.
고등학교 때는 왜 그렇게 용기가 없었을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일 거다. 영화를 보면 좋은 점은 현실과는 다른 에너지로 잠시간 이동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거 말고 좋은 점이 더 있을까? 그럼에도, 좋은 영화를 보고 싶다.
죽고 싶은 굳은 마음이나 용기 같은 건 분명 없을거다. 내가 나를 모기나 바퀴벌레 잡듯 콱 죽여버리겠단 의지는 없다. 그건 아빠에 대해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워하거나 이해해보려고 하거나 연결되어 보려고 애쓰는 어느 자아의 '아빠가 보고싶어'의 반영이다.
맞아. 난 진짜로 죽을 생각은 없을 것이다. 죽지 않으려는 항상성. 그런 것이 있다고? 함. 일어나서 이제는 할 일을 해야하는데 도통 그럴 것이… 내킴이 오지 않는구나.
질문 더 하기. 나는 왜 일요일에 그 많은 시간 동안 단 하나의 창조도 하지 않고 엄마, 상화와 그저 연말 분위기를 즐기려고 하고 심이저 그 상황 자체를 현실 아닌 꿈처럼 붕 떠있었으면서!
답: 이미 일요일은 지나갔다.
오늘은 저녁 7시 약속 전에 무사히 할 일을 할 수 있을까?
답: 작업을 노려보면 또 뭔가 나오겠지. 쉬면서 명상도 좀 했지? 분명 조금 더 알거야.
엄마의 방법: 빛으로 감싸기.
에너지체는 손상되지 않는다. 원인은 부분적이므로, 훨씬 더 높고 큰 에너지로 우리를 치유할 수 밖에.
숨 쉬는 것만으로도 대단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평화를 연결합니다. 나는 더 높은 에너지에 접속합니다. 그 에너지를 그저 받아들입니다.
누운 게 아니라 앉아 있고. 환기도 하려고 창문도 열었고. 불도 환하다.
전시는 대체 어떻게 될까. 참여 작품들과 내 작업의 밸런스가 아주 중요하다. 그것을 나는 상당히 중앙집권적으로 정해보고 있다.
우웩… 앉아서 처리하는 너무 많은 일들. 현장에 가면 금새 확실해질 많은 불확실성들. 더, 더, 명확하게 필요한 일들을 정리해보자. 내가 작업을 돌보듯 작업도 나를 돌보리라고. 마치 모기의 뺨을 때리면 모기가 내 뺨을 때리듯.
어젠 너무 지쳤었고, 오늘은, 해야할 일을 하고 나면, 또 다른 임시변통을 만들어내겠지, 응? 계속 상상해보자. 가능태들을.
자살충동이 정신과 약 부작용 때문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상화가 모닝페이지 쓰라고 노트를 열어줘서 겨우 페이지를 쓰기 시작한다. 몽롱한 아침 상태에선 눈을 감으면 자꾸 뭘 한다. 그런데 눈을 떠보면 그건 내가 진짜 한 일이 아니다. 아침에 메디키넷도 먹었던 것 같은데 잠이 오지게 안 깬다. 생리 싫다. 생리중이다. 할 말이 모가 있나. 쉬 마렵다. 쉬 마려.
하루를 매번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 피로하다.
나는 약과 이인삼각으로 걷고 있다.
크리스마스가 이틀 남았다니 날짜를 쓰면서도 심장이 쫄깃하다. 손바닥도 찌릿하다. 뇌의 다른 부분을 쓰니 시간은 금새 흘러 갔다. 돌곶이는 생각보다 따뜻했고, 졸전 시즌에 날이 이렇게 따뜻할 수 있단 것이 놀랍기도 하고, 금새 미술원에 도착했다.
오랫동안 암전된 곳에서 프로젝터 빛만을 보는 것이 생각보다 나를 지치게 했기에, 공간을 화이트큐브로 밝히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 아닌지 마음 속에 창조적 혼란의 파장이 일었다.
'이 방 정말 멋지지?'하고 말을 거니까 '나 지금 막 보기 시작한 건데 나가고 싶지가 않다. 우리 그냥 문 닫아 버릴까?'하고 받아치는 게 아주 간지러웠다.
난 (내가 괜히 더 주접을 떨까봐) 말수가 줄어든 느낌이었다고 후에 상화가 말했다. 공방을 못 쓰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불안, 박탈, 이런 얘기들을 했다. 1월에 개인전하니까 오시라고 초대를 할 수 있어 좋았다.
졸전 작업들을 쭉 보니까 내가 개인전에서 어떤 감각을 전달해야 할 지가 조금은 더 명확해진 느낌이었는데, 그래서 집에 와서 이런저런 글도 쓰고 시도도 할 줄 알았지만 개뿔 지금같이 아침이 되어도 편집 파일을 감히 열어보기가 지친다.
빛, 음향, 각주, 가로지르는 산책로. 절대로 손상되지 않는 에너지체를 김싸 안는 빛 덩어리라는 - 도움이 되는 허구. 이것이 중요한 것이구나.
그리고 잘 비워진 흑백의 무빙이미지. 이것이 또 문제로다.
내가 작업을 돌보듯, 작업도 나를 돌보아주어서 - 같이 회복해나가면 좋겠다.
잠자리에는 호연 씨의 달력이 1月로 붙었다. 내게 다소 부담스러운 일월이 달력 덕분에 조금은 아름다워 보인다. 평화로워 보인다.
어제 재밌는 놀이를 찾아냈다. 식사 메뉴로 자음 끝말잇기를 하는 것이다. 최근 사자성어 끝말잇기를 하던 것의 확장판이다. 식욕없음에 도움이 되길 바라며 내가 고안했다. (이어서)
상화는 강아지 이름 끝말잇기를 고안해냈다. 이름을 상상할 수록 어째 귀엽고 정말로 강아지들을 보고 있는 마냥 귀여워하게 된다.
아침에 깨어나고, 밥을 먹고, 할 일을 하고, 외출을 하고, 또 밥을 먹고, 쉬다가 잠에 드는 일상이 조금은 더 힘겨워진 것을 문득 느낀다. 선생님에게 내가 어지럽지도, 다리가 뻗치지도, 메스껍지도 않고 등등 몸이 많이 괜찮아졌다고 하니까 '그게 바로 시작인 겁니다! 일단은 몸이 괜찮아 지는 것이요. 마음 치료는 그 다음부터 하는 거죠.'하고 말했다.
작업을 돌보면 그도 나를 돌볼테니, 절대로 무리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산책로를 조성해볼 지, 어떻게 관객들에게 모종의 돌봄을 줄 수 있을지? 빛의 공간을 만들고 싶다, 꼭. 손상될 수 없는 에너지체.
뭔가 일을 시작해보려는 몸부림을 며칠 간 쉬었는데, 오우… 일정은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다. 비디오도 게임도 나를 기다리고 있다.
어젯밤엔 캄캄한 화장실에 앉아 이 자취방이 아주 큰 아파트나 주택 같은 것이라 상상을 해보았다. 화장실을 나오면 원룸이 있는 게 아니라 거실이 있고, 침실도 따로 방이 있는 것이라고. 그래도 호림은 넓은 편이라 왠종일 처박혀있기도 하는데, 아파트에 가면 공기의 흐름 같은 것이 다른 걸 느끼곤 한다.
온수를 뜨겁게 온 몸으로 흘리고 있으니 조금씩 에너지가 돌아옴을 느꼈다. 샤워하기는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데에 도움이 된다. 산책과 운전도 그렇다고 한다.
더 누워있다간 산송장 같을 거 같다. 근데 이 말은 환자들에게 실례가 되는 말 같다. 누워만 있어도 살아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의 은하계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배에서 꾸룩꾸룩 소리도 나고 이리저리 뒤척이고 따뜻한 스킨쉽을 갈구한다. 누워 있어도 하나도 같지 않다. 죽은 사람의 몸과는.
나의 커뮤니티를 대표하는 방법은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대표성 있는, 시의성 있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그런 키워드만 남발하게 되면 자칫 전개는 상당히 전체주의적으로 흘러간다.
눕는다. 수평.
앉는다. 반수직.
선다. 수직.
흐른다. 무엇이? 감정이, 에너지가, 소우주가.
내가 뭘 해야하는 지 알아야 할텐데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미래의 나는 알고 있다.
애처로움을 가져다 놓을 용기. 그러면서도 그것이 다른 종류의 힘으로 존재하는.
중요한 게 뭐지? Feel the Same. 공간을 구획하는 획일화하는 그러면서도 흐트러질 수도 있는 삼각형.
자란다. 흐른다. 빛에 감싸인다. 글을 읽고 쓰고 작업물을 조금이라도 몰입도 있게 만진다면 금새 느낄 수 있었던 흔하디 흔한 다이아몬드들이었는데 내가 어쩌다 이렇게 왜소해졌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안 해본 일들을 해보고 있는 것도 좋은 경험이지 않는가.
오늘이 정말 2021년의 말일이라고? 믿기지가 않는다. 나는 알람이 울렸을 때 아마 약을 먹은 덕에 (기억이 잘 안남) 약효가 드는 시간에 어김없이 눈꺼풀이 가벼워졌다.
웹사이트를 만지고 있으면 시간이 금방 간다. 바로바로 결과를 확인할 수 있으면서도 전체 틀을 잡을 수 있는 작업이라 그런가보다. 일기에 쓸 말은 여남아있지만 이제 작업을 하려 한다.
어제 말일이라고 갑자기 강남역에 갔다. 사람은 별로 없었고 밤 10시가 되니 가게들에 불도 다 꺼져서 곧 멸망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망하지 않고 2022년이 왔다. 올해 2월 2일에 태어나는 아이는 최고의 주민번호 앞자리를 가질 듯 하다.
1/1을 느긋하게 시작할 줄 알았던 것이, 아, 나 혼자 아침을 일으켜 세워야하는구나, 하고 작게 좌절한다. 포기라는 단어보다는 그래, 좌절의 연속.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좌절하며 일상을 이어간다. 하지만 좌절할 수 있다는 것은 매일, 매일, 매일, 용기를 내기 때문이다. 좌절할 용기를, 어쩌면 운 좋게 해낼 지도 몰라, 그 희망에 건 용기를, 어쩌면 오늘 하루는 즐거울 지 몰라, 그 희망에 건 용기를.
이것저것 자신이 없다. 공모를 대충 대충 내는 것도 그냥 혹시라도 일정이 생기는 게 싫어서 였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재밌는 일이 생기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오늘 상화가 '모닝페이지 써!' 했는데 '싫어!' 했다. 모닝페이지에 대한 실망감과 배신감이 좀 있는 듯. 아침을 일으키는 것은 정말 힘든데 이상하게 요즘은 정오 직전만 되면 졸음이 달아난다. 자고 있는 것에서 누워만 있는 것으로 바뀐다. 다 약 때문일거야. 나 좀 잘 좀 도와줘라.
맡기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