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2201

2022-02-05

어제는 종일 구슬을 꿰었다. 마음에 드는 게 많았는데, 그새 부자재를 다 써서, 새로 사오는 날을 기다려야 된다. 좋은 금속 부자재를 많이 갖고 놀고 싶다. 학원을 자주 나오니 아이들과 있는 시간이 다시 익숙해진다. 다정한 아이들도 발견하게 된다. 약간씩 감동하게 되는 순간들도 되돌아온다. 멋진 아이들에 이제 익숙해져서 잘 놀라지 않는 것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두 과정일 것이다.

언젠가는 쓸모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남겨놓았던 유년기의 일기들을 앵간 내놓았다. 글씨를 지금보다 더 못쓰고, 마음 속으로는 크게 상처받았던 일이나 크게 슬펐던 일들이 무덤덤히 적혀있었다. 참으로 평범한 인간이다, 싶었다. 10년은 넘게 간직해왔던 것 같지만, 이번에 아빠의 죽음을 정리하며 모든 것은 - 작품이 아닌 이상? - 짐이 되고, 폐기할 일손만 더 든다는 걸 알게 됐다. 뭔가를 갖고 있다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일이다. 이 종이도, 이 페이지도, 기록같지만 지금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일 뿐.

엄마가 전시를 하는 것은 큰일이고 방을 치우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라, 다 똑같이 수련이 되는 일이라고 했다. 정말로, 정리를 하는 건 내게 작업을 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오랜만에 정리를 하고 있으니 장례 그 이후와 이전의 모든 것들을 연상시키는 갖가지 물건과 감각들이 치민다. 이제 좀 나아졌나? 누구에게 확인을 받지? 정신과 의사에게? 내 전시의 성과에게서? 집안이 정돈된다면 그것이 좀 더 나은 일상의 시작이겠지. 세계에, 물리적인 부피를 덜 차지하고 싶다. 적어도, 갑자기 내가 죽게 되었을 때, 남은 짐이 간소하면 좋겠다.

2022-02-11

깜이는 내 무릎 위에서 눈을 깜빡이고 재채기를 하고 턱을 괸다. 집을 조금 치웠다. 기쁜 일이다. 집을 조금 치웠다니. 놀라운 일이다. 유품 정리 수준으로 집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매일 수많은 짐들과 먼지가 기관지를 조인다. 나는 전시가 끝나고 웅크린 달팽이처럼 하루하루를 보낸다. 작가의 일상이란 스스로 창안하는 것일텐데. 어떤 삶의 루틴을, 글을 읽고 생각을 하는 태도를, 또 스스로 경제적으로 자립할 체계를 잡을 수 있을 지. 스타트업 서바이벌쇼가 생겼던데 재미있게 보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모두가 격리된 가운데, 세상은 멈춘 척 하며 더 더 빠른 속도로 달리는 것 같다. 나는 그저 shelter를 찾고, 마련하고.

2022-02-12

모닝페이지를 쓰려했는데 펜이 안 나와서 - 그러다 어린이들이 정신 없이 굴어서 아무 것도 쓰지 못했네. 오늘 세수도 안하고 학원으로 온 탓에 정신이 산만하다. 이도 닦지 않았고 배도 고프고. 어린이들 사이의 기싸움에 정신이 또 피로하고, 그렇다. 나는 어제를 기억하나? 그제는 기억하나? 내일은 기억할까? 연속성 없는 하루가 또 시작된다. 작업을 안하고 있어서 그런가. 아마도. 연속성 있는 하루를 위해서는 일단 방을 치워야지.

  • 질감 표현하기 좋은 재료들 출력해놓기
  • 사람 - 기사 자료, 얼굴 질감
  • 식물 - 열대 과일, 선인장, 나무 질감
  • 동물 - 파충류, 무늬 화려한 종류
  • 자연 / 사물 - 물, 불, 쇠
  • 그리는 판 다양하게 - 알루미늄, 석고, 천, 박스….
  • 만들기 - 재료를 한정해서 주는 것도 방법일 듯
  • 점 재료, 선 재료, 면 재료
  • 2022-02-15

    상화는 내가 어지러운 집안 상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걸 알고 같이 집을 치우고 가구도 또 한번 옮겨줬다. 침실이 (엄마 말로는) 호텔방처럼 아늑해졌다. 지금으로썬 집안에 말하자면 나를 위한 다기능의 레지던시를 만들고 있지. 2022년에는 작업과 생계에 조금 더 돌파구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2022-02-17

    오전에는 옷장을 정리했다. 정리된 상태가 출발선일텐데, 출발선도 지키지 못했던 나날들. 정말 오랜만에 속옷과 양말 위치를 정리했다. 내 삶은 복구되고 있다. 아마도. 그게 뭐라고 이런 과정까지 필요로 하나 싶지만. 이제 집 정리는 슬슬 마무리하고 - 본 작업들을 추진해야 한다.

    상화가 가장 유능한 때는 내가 화가 머리 끝까지 났을 때이다. 그리고 남은 시간들은 서서히 나를 열받게 하는데 쓰는 것 같다. 여행이나 이주는 너무 멀고, 집은 너무 가까운, 그런 상황인 것이다.

    2022-02-18

    발 디딜 틈 없었던 거실이 약간의 노동으로 차근차근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간다. 집에 질서를 부여하고 있다. 스스로를 돌보기 위해, 나의 일부들을 돌본다.

    학원 도착. 오랜만에 애들에게 한예종 괴담을 들려줬다. 그리고 드디어 번역을 시작했다. 아주 몹시 기쁨. 학원 점심시간을 활용해 발동을 걸었는데 생각보다 재미가 있다.